원불교교사(圓佛敎敎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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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교사(圓佛敎敎史)

제2편 회상(會上)의 창립(創立)

제4장 끼쳐주신 법등(法燈)

4. 대종사의 열반과 정산 종법사 추대

원기 28년(1943·癸未) 6월 1일, 대종사께서 열반하시었다. 이 해 5월 16일, 총부 예회에서 설법하시기를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고, 범부가 깨쳐 부처가 되며, 제자가 배워 스승이 되는 것이니, 그대들도 어서어서 참다운 실력을 얻어 그대들 후진의 스승이 되며, 제생 의세의 큰 사업에 각기 큰 선도자들이 되라. 육신의 생사는 불보살이나 범부 중생이 다 같은 것이니, 그대들은 또한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으며, 공왕 공래가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라. 생사가 일이 크고 무상은 신속하니 가히 범연하지 못할 바이니라] 하시고, 그 날 오후 위석(委席)하시어, 15일 후인 이 날 오후 두시 반 거연히 열반하시니, 세수(世壽) 53세요 개법(開法) 28년 이었다. 모든 제자의 애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일반 사회의 차탄(嗟嘆)하는 소리 연하여 마지 아니 하였으며, 허공 법계와 삼라 만상이 다 같이 슬퍼하는 기상을 보이었다.
6월 6일 오전 10시, 총부 대각전에서 경향 각지의 수천 대중과 불교 연맹 이리 7종(宗) 승려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엄한 영결식을 거행하고, 이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7월 19일 종재식을 마치고 이리시외(金江里)묘지에 유해를 안장하였다. 대중이 다 창황 망조한 가운데 초종 장례는 김 태흡이 주례하였고, 종재에는 총독부 고관들의 존경을 받던 일본 명승 상야 순영(上野舜潁)이 참석하여 설법 중 흐느낌을 금치 못하였다.
대종사의 장례 행사를 마치고, 6월 7일, 수위단회에서는, 초창기 이래 수위단 중앙단원이던 정산(鼎山) 송 규 법사를 후계 종법사로 추대하고, 6월 8일에 새 종법사 취임식을 총부 대각전에서 거행하였다.
정산 종법사는 원기 전 16년(1900·庚子) 음 8월 4일에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慶尙北道星州郡草田面韶成洞)에서 구산 송 벽조(久山宋碧照)와 준타원 이운외(準陀圓李雲外)의 3남매 중 장자로 나시었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총명하고 국량이 호대하며, 기상이 화청하여 신성한 풍이 보였으며, 8세부터 가문의 전통에 따라 유서(儒書)를 대강 통독하시었으나, 거기에는 재미를 얻지 못하고, 과거 성현들의 사적을 즐겨 읽으며 [나도 장차 천하의 큰 공부로 천하의 큰 사업을 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어 보리라]고 스스로 발원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혹은 이인 은자를 찾아 강호와 산곡을 순력도 하고, 한 칸 초당에 두문 정좌(杜門靜坐)하여 심공을 계속도 하시다가, 종종의 이적이 스스로 나타나 이웃을 놀라게 한 일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마음 속의 발원은 날로 깊어져, 17세 때, 전라도로 건너와, 여러 교파를 차례로 역방하시다가, 정읍 화해리(井邑花海里金海運집)에 우거 중 대종사의 친영을 받아, 원기 3년(1918·戊午) 7월에 대종사께 오시고, 약관 19세로 수위단 중앙위에 서임(叙任)되시며, 법인 성사를 8인 동지와 함께 혈인의 이적으로 성취하시었다.
그 후, 봉래산에서 대종사를 모시고 5년 동안 새 교법의 초안을 보좌하시고, 원기 9년(1924·甲子)부터는 익산 총부 건설에 모든 동지와 수고를 함께 하시며, 12년 동안 교재 연구와 인재 양성에 주로 당무하시었다. 원기 21년(1936·丙子)부터 6년 간은 영산에서 성지 사업과 후진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시며 [창건사]를 초안하시고, 원기 27년(1942·壬午)부터는 다시 총부에서 [정전] 편찬을 도우시며, 교정 전반에 보필의 역을 다하시다가, 대종사의 열반에 따라 후계 종법사로 추대 되시었다.